액체적 재(Liquid Ashes) -무겁고도 느린 물 속 진혼곡
2009. 10 박은영 개인전 Liquid Ashes 액체적 재(液體的灰),
SeMA 서울시립미술관 신진작가지원 프로그램 선정 작가전, 토포하우스, 서울
액체적 재(Liquid Ashes) -무겁고도 느린 물 속 진혼곡
김 우 임(서울시립미술관 큐레이터)
박은영이 만들어낸 세계는 무겁고도 느린 물의 세계이다. 흘러내리며 또 다른 이미지와 합류하고, 상승하기도 하는 물의 성질은 작가의 작품이 구현하는 바와 일맥상통한다. 작가는 대상을 형태로 파악하기보다 물질로서 파악한다. 즉, 어떤 질료로 만들어내는 형태를 주목하거나 강조하기 보다는 물질 그 자체로서의 상태를 주시한다. 그에 따라, 작가는 물질을 근거로 혼란스러운 현실을 비의(比擬)한다.
실체를 왜곡하고 기만하는 허상으로서 여겨졌던 이미지와 상상력의 위상은 오늘날 중요한 능력이 되었다. 이 같은 상상력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을 이룩한 바슐라르는 이미지의 위상을 기존의 이성의 종속물 내지는 방해물로부터 인간 활동의 근원적 원천으로까지 혁신적으로 끌어올림으로써, 이미지와 상상력 연구에 있어서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을 이룩했다. 바슐라르가 말했듯, 현실의 세계와 꿈의 세계를 연결하는 것이 우리들의 감성이고, 이 감성의 세계가 우리가 막연하게 짐작해 왔던 것보다는 훨씬 구체적으로 인간의 삶에 있어서 결정적인 작용을 한다. 작가는 이같이 상상계와 현실계를 매개하는 연금술사와 같은 역할을 한다. 약초들을 혼합해 신기한 물질로 마법의 효과를 발생시키는 마법사처럼, 납을 금으로 연마하는 연금술사처럼, 박은영은 물질적 상상력을 토대로 의식이 뒤엉킨 상상계를 축조한다. 작가는 질료적 상상력에 근거해 식물, 안개, 빛과 같은 질료를 사용하여, 다양한 에너지를 발생시키며 몽상 속으로 빠져들게 한다.
그럼에도 작가가 기반을 두는 질료적 상상력의 중심에는 영상 이미지가 있다. 전시장 중앙에 놓인 몽롱하게 쏟아져 내리는 유동적인 영상이 공간에 놓인 오브제와 빛, 무대장치를 꿰어 하나로 만드는 구실을 한다. 물질적 상상력에서 연유한 ‘물’의 상상력은 이미지의 물질성에 주목하게 한다. 그녀의 작업에서 실체를 알 수 없는 액체적 이미지는 끝없이 흘러내리며 시시각각 다른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이를테면, <욕망의 공간>으로 명명된 블랙박스 안의 연기가 피어오르는 오브제는 신비스러움, 성스러움과 같은 분위기를 연상하게 한다. 또, 중앙의 영상에서 모호하고 느릿한 이미지는 그곳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몽환적인 상황을 연출한다. 이렇듯 상황에 따라 전혀 다른 속성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물질성이 작가의 작품에서 핵심을 이룬다. 액체 상태의 물은 연기와 같은 기체 상태로 변화하기도 하고, 영상 속의 그림자 이미지들과 뒤섞이기도 한다.
스컬피 인형 역시 비의적이고 주술적인 상황을 연출하는데, 이는 마치 비밀스런 종교의식처럼 보인다. 정지되어 있는 작은 인형들은 점멸하는 조명으로 인해 마치 움직이며 행렬하듯 보인다. 이 같은 인형은 퍼포머의 분신처럼 보인다. 인형이 실제로 튀어나온 듯한 퍼포머는 부토를 행하며, 무의식 너머의 심연 속 깊은 곳으로 떠내려간다. 죽음의 행렬 같은 이들의 움직임은 벽면에 투사되는 거대한 그림자로 인해 연약한 존재들의 강렬한 영혼을 상상하게 한다. 빛과 그림자의 역설은 인형들과 뒤섞여 진혼곡과 같은 어두운 감성을 자극한다.
전시장 곳곳에 놓여있는 식물들은 드라이플라워와 같은 재료들로, 시들지 않는 영원성을 상징한다. 건조하게 말려졌지만, 그 상태로 박제된 듯 보이는 식물들로 인해, 우울한 영혼을 달래는 진혼곡은 영원을 욕망하게 한다. 영원이나 불멸을 상징하는 헬리클리섬은 쇼케이스처럼 보이는 유리 상자 안에서 마치 장례식장의 관을 뒤덮은 듯한 형태로 드러나 있다. 꺼졌다 켜졌다 하는 프로젝터의 영상과 조명으로 인해 진혼곡과 같은 우울함은 더욱 배가된다.
유리 상자, 스크린 등은 안과 밖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반투명한 ‘막’은 호기심을 자극하며 매끈하고 평평한 표면 너머의 불투명하고 불균질한 이질적 세계를 욕망하게 한다. 이질적 문화와 매체, 장치들을 이용하는 작가는 자신이 경험한 문화적 체험과 어린 시절 기억의 파편들을 재조합해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낸다. 이 같은 상태 속에 들어가 신체로서 반응하는 관람객들은 저마다 혼란스러움과 즐거움을 겪으며 유동적인 세상을 경험하게 된다.
일본 무용 부토, 서예, 비디오 매체, 오행설 등 이질적인 요소들에 영향을 받아 온 박은영은 하나로 고정된 이미지가 아닌, 끊임없이 변화하며 유동적으로 움직이는 ‘상태’들을 보여준다. 다양한 문화적 요소들과 장르들이 뒤엉킨 이 같은 상태를 작가는 “액체적 재(Liquid Ashes)"라 부른다. 물질적 상상력은 물, 그림자, 식물과 같은 다양한 질료들을 각각의 상황과 연출 방식에 따라 또 다른 분위기로 시시각각 바뀌어 나간다. 물질들은 변화하는 공간속에 놓여 그림자의 향연 속에서 음울하게 혹은 유머러스하게 드러난다. 이처럼 작가는 고정된 실체가 아닌, 시시각각 변화하는 유동적인 상태를 드러내며 총체적 상황을 만들어낸다. 예측 불허한 세상의 축소판처럼 그녀의 작품은 하나의 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고 유동적인 ‘문맥’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흘러내리는 물처럼 상태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작품 덩어리’는 다양한 가능성을 일깨운다. 작가는 합리적 이성관을 넘어선 주관적 주관성에 주도적인 자리를 내어주며 욕망과 무의식이 뒤엉킨 이미지를 연출한다. 작가가 만들어낸 몽상적 세계에서 모든 물질과 원소, 이미지들은 서로 서로 연결되면서 영원한 순환의 고리를 이룬다. 혼란한 물질계를 정제하는 주술적 의식 혹은 축제처럼 박은영은 세상과 이미지, 그리고 물질을 매개하며 상상계를 지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