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트리스 파비스(Patrice Pavis)[1]

꽃, 그리고 눈물 :

박은영의 설치 및 멀티미디어 연극에 대하여

Conception & Direction / 박은영

영상출연 / 서승아(부토) 마마정 김(현대무용) 주재환(화가)

조명디자인/ 김철희

의상디자인/양재영

카메라/ 유신성 서윤아

사운드/ 타카(아코디언) 리코(피아노)

전반적인 방향 상실(Désorientation générale)

 

아마 예술 작품뿐 아니라 사람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첫 접촉이란 것이 결정적이어서, 그에 따라 만남이 일어날 수도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고, 상대에 대해 즉각적으로 지지하게 되거나 영영 돌아서게 되는 것. 이는 마리보(Marivaux)가 인간에 대해 이야기하며 “놀라운 공감 효과(les effets surprenants de la sympathie)”라 일컬었던 것과 같다. 다른 예술 작품에 비해 특히 설치의 경우, 암묵적으로 우리를 초청하고 또 긴밀하게 부추겨 참여하게 하는 저 첫 시선, 첫 움직임 그리고 첫 여정의 순간에 무척 많은 것이 달려 있다.

 

한전 아트 센터(Kepco Art Center) 갤러리의 꽤 넓은(12m x 22m) 장방형 공간으로 들어서며 우리는 우선, 공간을 제어하고 있는 듯한 각종 프로젝터와 컴퓨터 및 기계장치들을 보고 다소 겁을 먹게 된다. 중세 의상을 입은 두 개의 인물상이 우리를 맞이하고, 그 머리 위에는 당나귀 모자 형태의 독특한 가발이 씌워져 있다.[2]

 

우리는 희미한 미광 속으로 스며들어간다.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대부분의 관람객은 처음 우리를 맞이하여 즉각 주의를 사로잡는 커다란 스크린 영상으로부터, 곧 왼편으로부터 관람을 시작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렇게 우리는, 통상적인 미술관에서처럼, 또는 마치 글을 읽는 순서처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벽을 따라, 경계를 설정하는 빛의 가장자리 선이 밝혀내는 일련의 그림들을(tableaux[3]) 따라 걸음을 옮기게 된다.

 

그렇지만 우리는 또한, 벽의 그림들로 표시된 경로를 따르지 않은 채 한 벽에서 다른 벽으로 지나갈 수도 있다. 방향을 규정하지 않고 열린 채로 단지 펼쳐져 있기만을 요청할 뿐인 어떤 무대술(세노그라피/scénographie)에 활기를 불어넣으며, 우리들은 각자 고유의 드라마투르기(dramaturgie)를 선택하고, 시퀀스들의 순서를 결정한다. 무대술로 화(化成)하는 드라마투르기.

우리들 눈 앞에서 춤을 추는 무대술. 설치의 이 같은 드라마투르기적 환경 속에서, 관람객은 각 “아틀리에” – 스크린, 미니어쳐 설치, 모형 등 – 에 할애할 시간 및 공간적 층위를 선택한다. 새로운 시각적, 주제적 층위에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고 또 적응하기에는 얼마간의 시간이 소요되는데, 왜냐하면 각각의 세계가 고유의 법칙이나 분위기 – 각자가 자신만의 방식대로 제어하고 있는 어떤 특이성(étrangeté) – 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피아노에서 아코디언으로 이어 연주되는 동일한 음악은 반복을 통해 저 상이하고 혼성적인 세계들을 결합시킨다. 각각의 그림들에 개별적으로 (일종의 불협화음을 대가로) 음악을 부여하는 대신, 연출(mise en scène) – 연출가들은 인정하지 않을지라도 그들의 작업과 이 작업은 거의 동일하므로 – 은 전반적인 분위기 속에서 모든 지점에서 들을 수 있는, 총체적인 음향 장치를 선택한다. 음악(Taca의 아코디언 및 Riko Goto의 피아노 연주)은 조화롭고 “아우라적(atmosphérique)”이기 보다는 오히려 불안하고 신비스런 비창(悲愴)하기까지 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공연에서 종종 그러하듯 음악은 전체 앙상블의 키워드를 제공하고, 우리로 하여금 어떤 특정한 수용의 경향을 갖게 하며, 또 창조 중인 세계를 감성적으로 물들인다. 그리고 이 같은 서막, 이 감성적 채색은 완벽하게 통제, 제어된다.

 

설치와 장치(Installation et dispositif)

 

모든 설치는 장치인데, 조르지오 아감벤(Giorgio Agamben)이 다음과 같이 장치에 부여하는 일반적 정의에 따라서 그러하다: “생명체들의 몸짓, 행동, 의견, 담론을 포획, 지도, 규정, 차단, 주조, 제어, 보장하는 능력을 지닌 모든 것.” (Qu’est ce qu’un dispositif?, Payot, 2007, p.31)

 

박은영의 멀티미디어 설치는 그 용어의 연극적인 의미에서 하나의 도정(parcours)이라 할 만하다. 그녀는 관람객으로 하여금, 장소들, 장면들, 배우들로 기표(記標)된 공간을 자신의 방식대로 자신의 리듬으로 따라가고 발견해갈 것을 제안한다. 모든 도정은 하나의 드라마투르기를 구상한다. 여기서 우리는 한 장소, 한 프레임, 한 아틀리에, 하나의 중심으로부터 다른 하나로 이동한다. 그로부터 우리가 하나의 구체적인 스토리를 읽어낼 수는 없지만, 거의 자연적이랄 수 있는 습관에 의해 만일 우리가 하나의 주 맥락을 탐색하게 된다면, 우리는 분명, 다양한 방식으로 촬영되고 조각되고 축소되고 그려진, 그 모든 상태의 몸의 맥락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무언가로 화하고 있는 중인 저 몸의 형상화, 단계, 일관성 등과 연관하여 시선을 돌려보는 일은 관람객에게 달려 있다.

 

우리는 연극이 “아버지 연극(théâtre de Papa)”, 곧 배우와 관객의 만남이라는 그로토프스키적 연극 개념을 넘어섰으며, 예전까지만 해도 자신을 흡수해버릴까 파괴할까 두려워했던 각종 미디어에 이제는 덤벼들고 있다는 사실을 지나치게 낙관적으로만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다른 모든 동시대 예술에서처럼 연극에서도, 관건이 되는 것은 더 이상 특수성, 또는 다소간의 뚜렷한 현전, 예술 및 장르의 순수성이 아니라, 대조(confrontation), 상호작용, “재매체화(re-médiation)”이다. 박은영과 그 협력자들의 설치는 생성 중인 연극을 쇄신하며, 연극 예술의 전통적이고 관례적인 복합성을 증대시키고, 순수예술(beaux-arts)과 시청각적 미디어 사이에 유익한 충돌을 야기한다.

 

설치란 무엇인가? 설치는 관람객-관객-‘관찰자(viewer)’로 하여금, 연극의 정체성과 연극의 의도 – 본질을 포착하고, 텍스트의 지층이나 몸의 무한한 양상을 뒤돌아보며, 소위 연극의 특수성이라는 것, 현전이라는 것, 라이브라는 것 등에만 의존하는 – 를 상대화하거나 나아가 다시 문제 삼도록 북돋아준다. 기존에 주어지거나 혹은 새로 구성된 공간 속에서 설치 작품은 스스로가 가시적이며, 관람 가능하고, 반복 가능하다는 사실과, 자신이 사람의 몸을 보여주고 몸으로 하여금 이야기하게 만들며 수천 개의 다양한 이야기 방식을 창안하고 또 ‘연극적인’, 보다 일반적으로는 예술적인 재현(représentation)의 틀 및 연극의 개념을 깨뜨려버리는 자신만의 방식들을 지니고 있음을 명시한다.

 

눈물 속에 피어난 꽃들 속에서, 우리와 마주하여 우리를 엄습해오는 그 힘으로써 우리네 눈물을 이끌어내는 저 아름다움 속에서, 이 설치 작품은 각종 미디어를 끌어오고 있다. 이 미디어들을 다 열거하기란 너무 어려우며, 그러기에는 그것들을 잊어버리거나, 그것들의 새로운 결합을 지나쳐버릴 위험이 따른다. 왜냐하면 박은영은 단순히 비디오, 필름 몽타주, 활동 사진, 각종 영사만을 끌어온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결합하고 연결 지어 참신한 조합들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그녀는 미디어와 조형예술의 상호작용 및 혼용(hybridité)을 통해 인간의 형상들과 정체성들을 나타내는 방식들을 탐색하는 일을 고수한다. 그런데 전통적인 순수예술 (회화, 조각, 시, 무대술)과 시청각적 미디어를 동시에 능란하게 다룰 수 있는 예술가를 만나는 경우는 극히 드물며, 특히 여러 예술의 바그너적이고 상징주의적인 종합을 넘어서서 그것들을 하나의 혼합주의적(syncrétique) 시각 속에서 대면시킬 수 있는 예술가를 만나는 경우는 훨씬 더 드물다. 실제로 박은영의 설치는 다양한 문화권(특별히 유럽의 – 프랑스와 독일의)에 속한 텍스트적, 음악적, 시각적 재료들을 끌어온다는 점에서 인류학적인 의미로 혼합주의적이며, 또한 예술들과 미디어들, 예술적 지층들의 혼용이라는 의미에서도 그러하다. 엄밀한 의미에서 볼 때 그녀의 작업은 혼종적(hybride)이기보다는 혼합주의적인데, 왜냐하면 그것이 예술들 사이, 그리고 특별히 계급과 인종과 문화적 정체성의 차이들 사이에 있는 전통적인 분열을 극복하는 하나의 통합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한편 그녀의 탐색은 피아제(Piaget)와 왈론(Wallon)의 심리학적 의미에서도 혼합주의적인데, 이 둘은 어린아이가 언제나 디테일이 아닌 앙상블을 지각한다고 주장한다.

 

옛 연극(Le théâtre d’antan)

 

미문조(美文調) 로 낭송하는 배우들, 바로크적인 의상들, 두꺼운 회반죽지로 만들어진 고전적 장식들로 대변되는 옛 연극은 여기서 무대술을 위한 작은 인형들과 미니어쳐들로 잔재한다. 그 움직임이나 자태의 작은 요소가 놀랍도록 잘 표현된, 정교하게 만들어진 작은 인형들은, 삼면이 닫힌 이탈리아식 상자무대 속에 배치되고 연출되어 있다. 마치 귓가에 들려오는 것 같은 그들의 우아한 언사들, 매우 숙련된 자태들, 그들의 거리 감각, 이 모든 것들은 말라르메(Mallarmé)의 서술에 따르면 광휘를 연극의 가장 주요한 측면으로 여겼던 저 유럽의 옛 연극을 상기시키는 데 있어 훌륭한 효과를 낸다! 그리고 이 연극은 뮤지컬의 형형색색 요란한 세계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김철희의 섬세한 조명연출은 인물들의 예기치 못한 양상들을 표출시키는 가운데 저 상상적 작품에 고유의 리듬을 새겨낸다. 18세기 유럽 연극의 꿈처럼 아름답고 기품 있는 세계를 환기하는 데 있어 놀라운 정밀함과 넘치는 유연함이 엿보인다. 각각의 형상 속에는, 하나의 신체적인 자태로 잠정적으로 환원되는 하나의 움직임이 기입되고 또 농축되어 있으며, 그로부터 무대적인 움직임 및 삶이 암시된다. 공간 연출에 있어서의 세심함(모든 연극 연출가에게 요구되는 주요 자질 중 하나인), 비율, 거리, 신체적 태도 등의 적절함, 이 모든 것은, 무대 장치의 앙상블 속에 하나의 독자적인 공연의 환영을 불러 일으킨다.

 

촬영된 무용수들에서부터 중세 조각들, 무대의 축소된 작은 인형들 또는 애니메이션 영상 속의 인물형상들에 옷을 입히는 양재영(YEDO)의 의상들로 인해, 설치는 문화적이고 역사적인 정체성을 획득한다. 의상들은 시대 의상을 활용한 연극 연출에서처럼 매우 정밀하게 제작되었다. 그것들은 18세기 프랑스의 귀족 축제 정신을 완벽하게 포착하며, 세련된 미화(esthétisation) 및 훌륭한 기교의 힘으로 또한 그 정신을 초월하기까지 한다. 우리는 여기서 유럽 궁정 공연예술과 와토(Watteau) 식의 우아한 축제 분위기를 발견한다. 실루엣과 드레스, 연상되는 움직임들, 상상되는 다분히 재기 발랄한 대화 등에서는 섬세함과 활기마저 엿보인다. 그런데 이 우아함 – 여자-인형에서 이미 엿보였던 – 은, 마치 인생의 두 극단처럼, 이따금 그 반대되는 면모로 이중화된다: 죽음의 재현. 작은 인형들은 죽은 머리 또는 두개골을 지녔고, 존재의 덧없음을 나타내는 회화적 요소를 소환한다. 여기서 아름다움과 세련됨, 우아함과 에로티즘은 그 반대의 것들과 전혀 떨어져 있지 않다: 우리로 하여금 탐색을 그만두지 말고, 사물들의 표면에만 머무르지 말며, 외양으로만 만족하지 말도록 강제하는 저 모호하고 상대적이며 전도된, 대조적인 세계.

 

이따금 어떤 그룹은 무대의 앙상블에서 떨어져 나온 것처럼 보인다: 두 명의 그로테스크한 광대는 손에 꽃을 쥔 채로 즉석에서 결투를 한다. 추락, 비명이 새어 나오는 듯한 입, 곧 바닥에 닿을 팔다리 등이 모두 이 부조설치 속에 훌륭하게 담겨 있다. 드크루(Decroux)의 마임에서와 같이, 우리는 오직 몸이 행동 중인 몸의 법칙들에 따라, 또 태도들의 코드화와 더불어 그려질 때에만 그 움직임과 형상을 믿게 된다. 우리가 작은 인형들 주위로 아주 조금이라도 이동하기만 하면, 무대는 생동하여 살아 움직이게 된다.

 

또 다른 그림은 일종의 영상으로서, 또는 오브제 연극으로서 우리에게 제시되는데, 이때 무대 공간 및 영화적 프레임에서의 그 배치는 하나의 섬세한 연출을 이루어내며, 그것을 단지 고전적인 드라마 연극의 플롯들로 넘겨주지 않는, 각종 충돌들과 순환들, 곧 하나의 유쾌한 드라마투르기를 암시한다.

 

이미지의 이중의 놀이

 

모든 그림들이 그렇게 유쾌하거나 쾌활한 것은 아니다. 여자-인형의 영상(마마정 김의 춤)에서도 그러하다. : 유신성과 서윤아의 카메라는 관절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무표정한 얼굴의 인형처럼 춤추고 있는 한 여인을 정면에서 촬영한다. 이 몽타주는 다양한 태도들을 각각 포착함으로써 각기 다른 순간 촬영되었다가 슬로우비디오로 편집된 사진들의 연속이라는 인상을 준다. 공허한 시선의 인형은 계속해서 카메라를 정면으로 대한 채 조금씩 활기를 띠게 된다. 이 이미지들은 우아하고 에로틱해 보일 수 있으나, 그 여성의 얼굴이 멍과 상처로 부어올라 있다는 것을 인지하게 되는 순간 불안하고 염려스러운 이미지들로 화한다: 그것은 구타 당한 여성의 얼굴인 것이다. 관찰자는 저 아름다움과 고통 앞에서 스스로 이중적 죄책감을 느끼는 한 사람의 관음자가 된다. 에로틱한 사진들, 그리고 폭력에 관한 사실적인 이미지들의 교차적 제시는 무언가 그를 불편하게 하고 자책하게 하고 나아가 고발하는 힘을 발휘한다. 관람객은 이제 매혹에서 두려움으로 옮겨간다. 이때 영상의 촬영구도는, 마치 카메라의 시선과 시각 앵글 그리고 프레임이 육체성에 대한 준 신체적 탐색의 욕망을 드러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디테일을 에로틱하게 포착하고, 매우 감각적으로 피부를 조명하며, 비일상적인 구도 하에서 관찰할 수 있도록 몸을 제시한다. 그러나 이 같은 탐색은 다소 위험하다: 그것은 여성의 몸에 대한 폭행으로 신속히 귀결된다. 관음자 관객은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라면 언제든 아름다움을 고통으로 변환시킬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사진들의 단속적인 몽타주 속에서, 관객은 이번 설치의 장치가 무엇인지를 가장 잘 지각할 수 있으며, 몸의 진술에 귀를 기울일 수 있다: 몸들의 작용 뿐 아니라 우리가 그 몸들을 지각하고, 그것들을 위치 시키며 또 우리 자신을 사적이고 사회적인 공간 속에 자리매김 하는 방식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인형의 몸은 아주 많은 것을 작동시킨다; 그것은 “우리를 위해서” 춤추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언제나 보다 많은 호기심과 욕망으로 다가가도록 부추긴다. 그러나 그 인형의 움직임은 끊임없이 저지되고, 중단되며, 경직된다: 그것은 거의 은밀하게, 여성-오브제의 이면을 보도록 만든다: 학대 받는 여성을. 몇 초간의 이 같은 짧은 중단은 우리의 시선을 불안정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관객-관음자로서의 신원확인은 매우 특별한 일이 되며, 에로틱한 픽션이나 내러티브적 흐름 속에서 결코 소멸되지 않는다. 개개인은 자신의 책임들을 마주한다: 기계적인 움직임들을 멈추게 하고, 폭력을 향한 저 선회를 막는 것.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못한다: 필름은 끊임없이 돌아간다.

 

이 설치를 관람하는 도정은 매우 상이한 재료들이나 미디어들을 만날 때 관람객들이 멈춰 설 것을 요청한다. 그 도정은 전적으로 우연적이지는 않으며, 발견되기를 요청중인 어떤 논리에 따라 발생된다. 또한 그것은 모든 종류의 예술 및 몸의 상태 속에서 비롯되는 인간 몸의 재현에 관한 메타 이론적이고 추상적인 공연이 되지도 않는다. 그것은 모든 종류의 미디어를 대조시키고, 몸을 재현하고 조명하는 그 미디어들의 능력을 비교하면서, 다양한 미디어 속에서 인간의 행동을 제시하는 기술에 관한 일련의 생생하고 섬세하며 직관적이고 신속한 – 예컨대 유성처럼 일순 눈부시게 명멸하는! – 변주이자, 일종의 유쾌한 산책이다. 인간의 몸과 그 몸이 움직이는 모든 것을 깊이 살펴보기 위한, 각종 미디어와 예술, 그리고 각종 움직임 및 춤 유형의 능력과 방법론이 거기서 다루어지고 있다.

 

그 정방형 공간의 대각선 방향에 있는 다른 코너에는 또 하나의 세계가 설치되어 있다. 한 비디오 이미지 속에 어떤 난해한 무질서가 펼쳐져 있어, 우리를 이끌어가고 또 흡수하는 것이다. 여기서도 우리는 지하실에서 촬영되고 춤추어진 저 이야기 – 생생한 물질성 및 빛깔을 지닌 붉은 천 더미, 그리고 실제 오브제들과 대조를 이루는 – 를 지각하게 된다.

 

좁은 지하 복도에서 촬영한 필름에 담긴 부토 무용수(서승아)는 땅의 내장으로부터, 지옥의 연기로부터, 또는 바닷물로부터 출몰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는 그로부터 빠져 나오기 위해, 그리고 가시적인 감정을 최소한으로 표현하고 표출하기 위해 애쓴다. 그녀는 앞을 향해, 우리를 향해 나아오지만 결코 우리 – 이미지 바깥에 있는 – 와 합류하지 못하며, 우리의 공간, 또는 생생한 붉은 천 – 비디오 이미지의 생기 없고 푸르스름한 분위기와 대조되는 – 으로 가 닿지 못한다. 마치 달리기를 멈출 수도 없고 결코 목적지에 닿지도 못하는, 어떤 이의 꿈 속에서와 같다. 카메라, 그리고 그에 이어 우리의 시선은 극히 미미한 움직임들, 곧 몸의 표피를 뚫고 나오는 일종의 미세 움직임의 기포들만을 포착한다. 부토 무용수의 몸은 시공간 속에서 더 이상 어떻게 이동해야 할지를 알지 못한다; 그 몸은 그로부터 이따금 움직이고자 하는 욕망이 출현하는 하나의 풍경일 뿐이다. 비디오(“텅 빈 물(vide-et-eau)”이라고 박은영이 칭한) 이미지의 유동성은 이 같은 범접 불가능한 유동체적 몸으로 고요히 다가갈 수 있도록 해준다. 일본 또는 한국의 부토 춤을 촬영한 푸르스름한 비디오는 구타당한 서구 여자-인형의 단속적인 이미지와 대조된다. 그로부터 한 여성의 몸, 곧 스스로에 대해서는 폭력적이되 외부 세계에 대해서는 냉정하고 태연한 여성의 몸이 도래한다. 단속과 연결 사이, 스타카토와 레가토 사이에서, 설치는 어느 하나를 선택하지 않으며, 이를 통해 마치 폭력 – 그 표현 방식이 어떤 것이든 – 의 보편성을 암시하려는 듯하다.

 

그리기 혹은 달필하기(Peindre ou calligraphier)?

 

고통 속에 움직이고 있는 저 여성의 몸들에 대비되는, 움직이지 않는, 혹은 거의 부동하는, 마치불교의 수도승처럼 사색중인 한 남자의 몸이 있다. 그는 르냉(Le Nain)의 그림 속에서처럼 촛불들로 밝혀진 하나의 회화적 공간 속에서, 자신의 서예 붓을 종이 위에 내려놓을까 망설이고 있다. 남자는 마치 어떤 행동을 수행하기 직전에 돌로 굳어버린 것 같다 : 무언가가 그를 막아서고 있는데, 그렇다면 정확하게 무엇이? 동양의 달필가가 되기에는 지나치게 서양의 화가로 화해버렸다는 사실이? 말라르메적 시인이 그러하듯, 계획과 행동 사이, 관념과 형상 사이, 의미와 소리 사이에서 부유하느라? 혹 그것은 어떤 것도 더 이상 감히 재현할 수 없고, 자신의 창작물 속에서 스스로 구현되기를 거부하는 예술가의 상징적 형상인가? 말라르메에 따르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의 책으로... 곧 모든 것 사이에 있는 관계들의 송가(hymne)로 귀결되기 위해서 존재한다.” 그러나 오늘날 이 책은 더 이상 쓰여지지 않으며, 쓰여질 수 없다. 어쩌면 기껏해야 우리는 그것을 공간 속의 몸들로, 곧 “모든 것 사이에 있는 관계들의 송가”로서 형상화할 수 있을 따름이다.

 

박은영이 그의 협업스탭들(또 하나의 집단적이자 비가시적인, 그러나 편재하는 몸들인)과 함께 고안하고 구성해낸 이 초상들의 전시는 어찌 되었든 우리에게 저 “모든 것 사이의 관계들”에 관한 놀라운 밑그림을, 그리고 무엇보다 몸들을 제공해준다. 몇 미터 채 되지 않는 공간에서 단 몇 분의 시간 동안, 박은영과 그 동료들과 함께, 각종 만남들이 야기하는 뜻밖의 즐거움에 취해, 우리는 하나의 세계, 곧 우리 상상력과 우연의 유일한 열매인 것처럼 보이는 한 세계를 편력하였다. 우리는 놀이를 즐겼고, 우리의 몸과 타자의 몸을 지속적으로 탐색했으며, 그럼에도 우리는 처음부터 줄곧 인식하고 있었다. “주사위 놀이는 결코 우연을 폐기하지 않는다(말라르메)”는 사실을.

 

연극은 우리 가운데 설치되어 있다, 몇 분 동안, 그러나 어쩌면 영속적으로. 우리는 장면들을 편력하고, 설치가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시나리오를 상상하는 데 이르렀다. 우리는 하나의 무대 위에서, 또는 훨씬 더 광대하게는 우리 속에서, 연극을 열어젖히고자 애썼다. 그러나 이 도정의 끝에서, 그리하여 섬세하게 구상된 이 장소를 떠나기 전에, 우리는 현실로의 귀환이 고통스러울 위험이 있음을 느꼈다. 하지만 우리들 가장 깊은 곳에 설치되어 있는 연극 예술 및 온갖 다양한 멀티미디어를 보는 위험, 그리고 그것들이 서서히 발전해가는 것을 느끼는 위험은, 고통스럽지만 감당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번역 : 목정원)

 

 

 

[1] 1976년부터 2007년까지 파리 3대학과 8대학에서 연극학 교수로 재직했다. 현재 캔터버리(Canterbury)에 있는 켄트(Kent) 대학 연극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2011년 3월부터 2년간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초청교수로 있다.

[2] 사진은 모두 안천호 작가 촬영본을 제공받았다. 이 자리를 빌어 감사드린다.

[3] 그림들(tableaux): 이 용어는 회화 작품으로서의 그림을 가리키기보다, 어떤 프레임 안에 포착된 일련의 영상 이미지를 의미한다. (역자주)